요것도 괜찮음
지겨웠다. 지속적으로 벗어나고 도망치고 싶었다. 이 어두침침한 교실 안의 풍경. 칙칙한 잿빛의 길거리. 학원 책상. 갑갑한 집. 과외쌤이 앉아있는 내방. 창밖으로 보이는 초록잎 나무와 다르게 영원히 다른 세상에 존재할 것만 같은, 나의 세상으로부터.
겉으로는 묵묵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내 속은 언제나 들들 끓고 있었다. 모든 걸 부수고 싶은 욕망과 갖고 싶은 욕망의 충돌. 반애들의 웃음도 내게는 거칠고 바스라질 가짜, 정신을 시끄럽게 하는 괴로운 것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해맑은 걸까. 이런 현실 속에서도 끝끝내 웃을 것을 찾아내어 웃어내는 그들이 싫었다. 모두 망가뜨리고 싶으면서도 나 또한 그럴 수 있길 바랐다. 해맑게 웃는 게 무슨 죄라고, 이런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 교실에 존재하던 너. 묵묵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한 장씩 문제집을 넘겨나간다. 가끔 괴로운지 다리를 꼰 채 몸을 기울였고, 그럴때면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도통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다. 점심시간에는 홀로 구석진 운동장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가끔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문득 너가 떠오른다. 급실실에서든 운동장에서든 네 생각에 고개를 돌리면,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다. 짙은 눈썹과 속눈썹,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눈동자.
너에대한 꿈을 자주 꾸었다. 너와 내가 함께 있어본 적 없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우리는 만났다. 물의 표면만 반짝이는, 불꺼진 캄캄한 수영장에서. 무언가 무서운 것이 나타날 것만 같아, 이 차가운 물방울이 물인지 나의 식은땀인지 알 수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물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물안개를 뿜으며 올라왔다. 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빛나는, 까만 수영복을 입은 너였다. 물에 흠뻑 젖은 채, 너는 점점 내게로 다가왔다.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끝까지 버티고 싶었다. 가위를 눌린듯 꼼작 할 수 없었다. 사타구니가 무직하니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나의 양 어깨를 잡았을 때, 늘 마주하지 못했던 너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몸은 무겁게 가라앉아 물속으로 빨려들었다. 캄캄한 물 속에서 빛나는 너를 보며 아득히… 아득히 가라앉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다 젖어있었다. 너를 바라보며 마음이 간질거리는 건 너를 좋아해서일까 너와 자고 싶어서일까. 나라는 인간은 왜이렇게 추악한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순간인데 무엇이 두려워 버티는 걸까. 아득히 멀어져갈텐데. 그런 생각으로 도서관을 갔다. 너는 책장 앞에서 생각에 잠긴듯 가만히 가만히 서있었다. 나는 읽을 책도 없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 또한 나를 의식하는 걸 느꼈다.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말을 걸었다. “무슨 책이 재밌어?” 너는 내게 책을 추천해주지 않았다. “지겹지?” 무슨 마음인지 안다는 듯, 그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나는 답했다. 그녀가 살짝 웃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웃겼던건지, 이유는 모르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향해 웃었다는 것. 그 후로 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쪽지를 주고 받았다. 아무도 모르는 우리만의 비밀놀이처럼. 스마트폰 시대에 누가 이런걸 할까 싶지만, 그보다도 떨리고 들뜨게 만드는 쪽지 놀이. 책상서랍에, 사물함에, 신발 속에, 가방 속에, 우리는 틈만 나면 쪽지를 넣었다. 쪽지에는 무엇이 좋은지 싫은지 사소한 모든 것을 썼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싫다던지. 여름엔 까맣게 타는게 좋다던지. 겨울 외투는 두꺼워서 싫지만 넓고 포근한 목도리는 좋다던지. 비오는 날 교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 싫다던지. 우리는 비슷하기도 했고 무척이나 다르기도 했다. 서로 아는 것은 쪽지에 담긴 그 뿐인데, 단 둘만이 서로의 모든 것을 아는 것만 같았다. 세상이 멈춰서 우리 둘만이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 정도로, 나는 너에게 푹 빠져버렸다.
너에대한 꿈을 더 자주 꾸었다. 이제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아닌, 일상적인 장소에서 만났다. 운동장에서, 교실에서, 도서관에서, 복도와 양호실에서. 비현실적이도록 아무도 없는 고요한 그곳에서 너 홀로 존재했다. 나의 바람처럼. 너와 나는 손을 잡거나, 서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고작 그정도로도 젖은 채 깨어났고, 그때의 감촉은 현실에서도 지속될 만큼 생생하고 낯설었다.
엄마가 눈치를 챘다. 내가 무언가에 정신이 온통 팔렸다는 걸. 숨긴다는 건 익숙한 일이다. 언제 내 방을 어떻게 뒤져볼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너에게 받은 수많은 쪽지를 절대 집으로 가져오지 않았다. 차라리 자물쇠 잠긴 사물함이 더 안전할 노릇이었다.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나 자주 엉망이 되는 속옷과 바지도 이상할 노릇이겠지. 엄마란 존재는 어떻게 모든 것을 아는 걸까. 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지겹게 공부하던 내가, 너와 쪽지를 주고 받으며 하루하루 숨쉬며 공부할 수 있었다는 걸. 이 공부라는 것에 어떠한 희망을 걸기 시작했다는 걸. 엄마는 그것이야 말로 본인이 원하는 것임에도 본질은 헤아리지 못한다. 방을 뒤지고, 가방을 뒤지고, 폰을 뒤지고, sns를 뒤져도, 엄마는 너에 대해 단 한 톨도 알 수 없었다.
엄마가 학교에 다녀갔고, 담임에게 불려가 상담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우리 사이를 알 리가 없었다. 성적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대체 어른들은 왜그러는 걸까. 아, 맞다. 성적이 ‘오르지'않으면 문제지? 더이상 오를 곳이 없음에도 어떡하란 걸까. 나보다 위에 있는 몇몇 친구들, 그애들도 나와 똑같은 압박을 받는 것을 안다. 나보고 그들을 이기라고? 내게는 그들만큼의 독기가 없다. 공부로 얻는 즐거움도 없다. 이제야, 이제야 조금은 희망이 보이는데 왜, 왜 내게 이러는 거야. 엄마가 다녀가고, 담임에게 불려가자, 교실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고 반애들은 나에대해 수군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 좁은 사각형 교실이 점점 더 조여오는 것 같았다.
너에게 쪽지를 썼다. 처음으로 다른 말을.
“도망치자"
우리는 옷과 돈을 챙겨 등교했다. 하루종일 두렵고 설렜다.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하교를 했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너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지하철 화장실로 가 옷을 갈아입고 만났다. 너는 교복 위에 걸쳤던 코드를, 까만 원피스 위에 입고 나타났다. 목폴라 까만 원피스. 새하얀 피부에 까만 머리카락, 눈썹을 가리는 두툼한 앞머리. 너는 참 추운 계절이 잘 어울린다. 아무 무늬도 없는 까만 원피스일 뿐인데, 그래서일까, 왜 까만 수영복이 떠오를까. 나는 목도리를 좋아한다는 너의 쪽지에, 꽤 오래전에 사둔 캐시미어 목도리를 꺼냈다. 회색과 검은패턴의 목도리는 너와 참 잘어울렸다.
우리는 가로등 아래, 공원 벤치에 앉아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얘기했다. 뷔페를 가고 싶었고, 좋은 호텔을 가고 싶었다. 우리는 모아둔 돈이 꽤 있었다. 쓰고 싶어도 쓰지 못했던 돈.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쓸 수 없었던 돈. 이 돈을 오늘 하루를 위해 다 쓰기로 했다.
핸드폰은 꺼버렸다. 백화점에 갔다. 향수를 구경하고, 입욕제를 샀다. 너가 호텔 뷔페에서 기다릴 동안, 나홀로 방을 잡았다. 익숙한 척하는 것은 의외로 쉽고 간단했다. 걸림돌 없이 뷔페가 다시 너와 만났다. 우리는 벤치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서로가 주고 받았던 쪽지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떤 것을 좋아했는지, 어떤 것을 싫어했는지 떠올리며 서로의 접시를 채워주었다. 부모님께 배운 양식 식사 예절을 흉내내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음이 터져나왔다.
괴롭다. 더이상 이 괴로움을 털어놓을 곳도 없다. 왜 자꾸 부정적인 생각만 드는 걸까. 자꾸만 어두운 감정에 잠식당한다.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저 잊어버리고 좋게 지내면 될 일인데, 불쾌한 생각과 기억은 끝없이 내 주위를 멤돈다. 돌고 돌다 결국은 감정을 장악하고 입에서 튀어나오게 한다. 내가 이렇다고, 내 심정이 이렇다고, 잘 있다가도 툭툭, 그가 알아주길 바라면서, 악랄하게는 그도 나처럼, 실은 나보다도 더 괴롭길 바라면서 계속 말하게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감정과 기억을 꾹꾹 누르다, 하루가 끝나갈 때 즈음이면 결국은 뱉어내고 만다. 굳이 좋은 순간을 나쁘게 만들 필요가 없는데, 나는 자꾸만 그런 상황을 구성한다. 나는 아직도 힘들고 괴로운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고, 나를 이해할 생각도, 내 고통을 해소해줄 생각도 없는 것 같다. 난 도대체 어떤 희망에 나를 걸고있는 것일까. 그냥 모든 게 망가진 것 같다. 나를 괴롭게 했던 그 시간동안, 그는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고작 별것도 아닌 담배 피는 습관을 숨겼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과는 가깝고 즐겁게 지내면서 함께 담배를 폈었다. 나는 그와의 오래된 연애 기간 중 힘든 시간이 길었음에도 우리의 관계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감내하고, 힘든 일들을 함께 견디며, 매 순간 하나 하나의 어려움을 뛰어 넘으며 4년이란 시간을 버텨왔다고. 그런데 그는 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4년이란 시간을 함께 해봤자, 담배 피는 것을 숨길 정도로… 우리의 관게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아무리 그 사람들이 그에 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마치 내 인생의 오점마냥, 나는 용납할 수가 없다. 또한 그 사람들이 아무 생각이 없었을 리도 절대 없다.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 아니까. “선배는 알아요?” “아직 말 못 했어.” 매번, 매 순간 이런 대화가 오갔겠지. 그리고 내가 알게 된 그날 이후부터 그와 내가 함께 있을 때면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ㅇㅇ이랑 같이 담배 한 대 펴고 와도 괜찮지?” 그와 같이 담배를 피기 전에 내 눈치를 본다. 그 또한 마찬가지고. 그 자체로 기분이 더럽다. 고작 담배 피는 것 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쪼잔한 인간이 된 것 같고, 그 인간들이 그가 내게만 담배 피는 것을 숨겨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좆같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많은 순간 내 앞에서 그 사실을 함께 숨겨왔다는 것이 제일 좆같다. 좋아했던 인간들이 싫어졌고, 싫어했던 인간들은 혐오하게 되었다. 나만이 몰랐다는 사실. 내가 모르는 그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은 안다는 사실. 씨발. 칼로 내 자신을 갈기갈기 찢고 싶다. 더럽다. 도대체 우린 뭘까? 너와 나는 뭘까? 난 뭘 위해서 많은 것을 감내해왔을까. 힘들고 괴로워서 견디기 힘들면서 늘 그와 함께하기로 버티는 멍청한년. 인생이 망가진 기분이다. 저 놈 하나 없다고 내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내가 구제불능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마치 모든 걸 잃는 기분이라서, 인생이 끝날 것만 같다. 망가져서 회복될 수 없을 것만 같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해. 절대 되고 싶지 않던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늘 잘못된 상대와 연애를 시작하고서 인생에 오점을 남긴다. 어쩌면 내 자신이 오점일지도 모르지. 내가 회복할 수 있을까.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면, 지금 이 선택을 바탕으로 더 나아가길 각오했다면, 더이상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때때로 괴로워서, 하루에 수십번이고도 거지같은 감상에 잠겨서, 그저 모든 게 망가졌다는 불안감에 찌든다. 난 정말 왜이렇게 멍청할까. 왜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감내할까. 언젠가는 헤어질 수 있을까. 아니면, 이런 일 쯤이야, 또 하나의 장애물이구나 하고… 넘어설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은 그가 싫다. 아무렇지 않은 게 싫고, 내가 괴로워서 떠들기 시작하면 또 시작이라는 그 얼굴도 싫고, 그 순간 자체가 나를 죽이고 싶게 만든다. 그는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하나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자신 또한 힘들었다고, 나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죽어버리고 싶다. 지금에서야, 더 나이가 들어서, 더 많은 경험과 생각이 쌓여서, 깨달았을 때. 나 또한 그를 괴롭게 했었다는 걸 안다. 나약하고 고통에 잠식당한 인간이라, 그가 나를 간절히 바랐을 때, 그저 나의 고통을 견뎌내느라 그에게 소홀했던 때가 있었다. 그와 나는 때가 맞지 못했다. 그는 처음부터 나의 모든 것을 감싸 안고자 했는데, 나는 아주 천천히 하나씩 그를 알아갔다. 그와 나는 속도가 맞지 않았다. 그가 이미 마음을 닫았을 때에야, 나는 그에게 크게 가까워졌다. 내가 그를 이해하고, 그에게 맞추고, 노력하는 동안, 그는 오히려 점점 나빠져만 갔다. 이미 마음을 닫아버려서 그랬겠지. 내가 너무 늦었던 거겠지. 그랬으면서 도대체 왜 내 곁에 있었던 걸까. 헤어지자고 하지 않고. 대체 왜. 왜 그렇게 괴롭게 하면서 옆에 있었던 걸까. 결국은 늘 내 탓이고, 나의 문제고, 나의 죄다. 모든 건 다 내가 이유고 나 때문이다. 결국은 늘 그렇다. 언제나. 언제나 그랬다. 인간은 변하질 않나보다. 딱 하나 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내가 끌리는 선택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 그게 옳은 선택이든 아니든, 그 반대로만 한다면, 난 다른 인간이 될 수 있겠지. 죽어버리고 싶다.
너무 오래동안 연인은 나를 속여왔다. 일기장을 보았다. 그전부터 힘들었을테지만, 2017년부터 그에 대한 슬픈 일기가 많았다. 그 기간동안 그는 나를 정말 많이 괴롭히고 지치게했고, 담배를 핀다는 사실을 숨겼다. 거의 일년반이 다 되어가도록. 그 별것도 아닌걸 이렇게 오래토록 숨겨운 거다. 담배를 핀다는 그 사실 하나를 숨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쳤을까. 나는 오만했다. 너무 오만해서 그가 담배를 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고, 그걸 숨길 것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 이제 앞으로 그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전에도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 했던 것을 생각하면,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불신이 든다. 내 사랑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을까. 그는 선을 넘어버렸다. 앞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말했다. 이 고통과 괴로움을 내가 감당하고 싶지 않다고, 문제를 빚은 네가 감당하라고. 정말 나와 계속 사귀고 싶다면, 네가 감내해야할 것들이라고. 솔직히 절망적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고, 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쌓여버린 서운함이 나쁘게 터져나왔던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별 것도 아닌 것을 숨겨 선을 넘고 우리 사이의 신뢰를 깨버리는 그는, 나는 그동안 그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그 오랜 시간동안 숨길 수 있었을까. 나는 무섭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는 생각하면 무섭다고 했다. 그랬는데 어떻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담배를 필 수 있었을까. 내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나는 그를 잃을까봐 그럴 수 없었을텐데, 그는 나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던거다. 매번 힘들고 괴로워서 그와 헤어질 생각을 하면서도 그를 잃을까봐 눈치보고 매달려왔는데, 그는 그만큼은 아니었던 거다. 결국은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인 게 맞는 거다. 나는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내 자신의 감정과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그를 위하지 않겠다고 그에게 맞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솔직히 이젠 더이상 그가 좋은 사람인지 모르겠다. 애초부터 그랬다.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좋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는 역시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간 내가 어떻게든 그를 좋은 사람으로 포장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그가 내게 한 수많은 잘못과 실수들.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거지. 그는 자기때문에 내가 무엇을 포기했는지 물었다. 그 순간에는 제대로 답해주지 못했다. 나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와이 결혼을 포기했고, 동거를 포기했고, 미래를 포기했다. 이제는 감정도 포기할 것 같다. 더이상은 마음도 주지 않을 것 같다. 그 전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너무 사랑하니까, 그 마음에 너무나 휘둘렸다. 그런데 이제는 그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 같다. 정말 더이상의 희생하는 감정은 주지 않을 것 같다. 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간, 나 또한 너무 오래동안 내 자신을 괴롭혀왔다.

